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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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이탈리아 북부 출신의 로마 제국 시대의 학자이자 작가이다. 그는 군 복무와 공직 생활을 거치며, 스토아 학파의 철학을 신봉했다. 주요 저서로는 백과사전적인 성격을 띤 《박물지》가 있으며, 이 외에도 다양한 역사, 문법 관련 저술을 남겼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구조 활동 중 유독 가스에 질식하여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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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는 소 플리니우스로 알려진 로마 제국의 법조인이자 정치가, 작가로, 웅변가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서간집을 통해 1세기 로마 사회를 기록하고, 베수비오 화산 폭발과 기독교인에 대한 보고서 등 역사적 자료를 남겼다.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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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
로마자 표기 | Gaius Plinius Secundus |
출생일 | 23년/24년 |
출생지 | 노붐 코뭄, 이탈리아, 로마 제국 |
사망일 | 79년 (55세) |
사망지 | 스타비아이, 이탈리아, 로마 제국 |
국적 | 로마 |
교육 | 수사학, 문법 |
직업 | 변호사 작가 자연 철학 역사가 자연사 군 사령관 속주 총독 |
자녀 | 플리니우스 (양자, 조카) |
아버지 |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켈레르 |
어머니 | 마르켈라 |
주요 작품 | Naturalis Historia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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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정보 | |
로마자 표기(확장) | Gaius Plinius Secundus Major |
발음(영어) | /ˈplɪni/ |
발음(한글) | 플리니 |
2. 생애
이탈리아 북부 코모(당시 노붐 코뭄)에서 태어났다.[57] 사상적으로는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받아 자연법칙에 따른 덕 높은 삶을 추구했으며, 이를 위해 자연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58][62] 그의 조카인 소 플리니우스는 플리니우스가 새벽부터 일어나 공부했으며, 목욕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독서를 멈추지 않을 정도로 학문에 매진했다고 전한다.[58][62]
23세 무렵 군대에 들어가 게르마니아 원정에 참여했으며, 50년대에는 로마로 돌아와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나 이후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70년부터 72년까지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현재의 스페인 북부)에서 황제의 대리인으로 근무하며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라스 메두라스의 금 채광 현장을 접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직접 보좌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이 시기 그는 비교적 자유로운 시간을 활용하여 방대한 저술 작업을 진행했는데, 로마의 역사를 다룬 책과 함께 네로 황제 시대부터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 온 그의 대표작 《박물지》(Naturalis Historia) 37권의 대부분을 완성했다.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플리니우스는 나폴리 인근 미세눔의 로마 함대 사령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39] 그는 화산 폭발 현상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위험에 처한 친구를 구조하기 위해 직접 함선을 타고 나폴리 만을 건너 스타비아이로 향했으나, 그곳에서 화산 가스에 질식하여 순직했다.[63][51]
2. 1. 출생과 가문
이탈리아 북부의 노붐 코뭄(현재의 코모)에서 태어났다.[57] 플리니우스의 생몰년도는 기원후 79년의 베수비오 화산 폭발과 조카가 남긴 그가 56세에 사망했다는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출생년도는 기원후 23년 또는 24년으로 추정된다.플리니우스 장로는 기사(騎士)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켈레르(Gaius Plinius Celer)와 그의 아내 마르첼라(Marcella) 사이에서 태어났다. 플리니우스 장로와 플리니우스 소는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의 궁극적인 출처는 베로나 들판에서 발견되어 16세기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 오노프리오 판비니오(Onofrio Panvinio)에 의해 기록된 단편적인 비문(CIL V 1 3442)이다. 그 형식은 애가이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재구성은 다음과 같다.
: PLINIVS SECVNDVS AVGV. LERI. PATRI. MATRI. MARCELLAE. TESTAMENTO FIERI IVSSO
: 플리니우스 세쿤두스(Plinius Secundus)는 아우구르(augur)로서 그의 아버지 [켈레르(Ce)ler]와 어머니 [그라니아] 마르첼라([Grania] Marcella)를 위한 기념물 제작을 명령했다.
실제 단어는 단편적이다. 비문의 해독은 재구성에 달려 있지만,[5] 어떤 경우에도 이름은 드러난다. 그가 아우구르였는지, 그의 어머니의 이름이 그라니아 마르첼라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6] 장 아르두앙(Jean Hardouin)은 알려지지 않은 출처의 진술을 제시하는데, 그는 그 진술이 고대 것이라고 주장하며 플리니우스가 베로나 출신이고 그의 부모는 켈레르와 마르첼라였다고 한다.[7] 아르두앙은 또한 카툴루스의 동향을 인용한다.[5]

비문이 어떻게 베로나에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플리니우스 장로는 베로나가 아닌 코모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대 갈리아 트란스파다나 출신으로서 베로나 출신인 카툴루스를 그의 동향인(conterraneus)이라고 부르지만, 동료 시민(municeps)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8][9] 코모 대성당 정면에 있는 플리니우스의 조각상은 그를 고향의 아들로 기리고 있다. 그는 플리니아(Plinia)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카이킬리(Caecilii) 가문과 결혼하여 조카인 소 플리니우스의 어머니가 되었고, 소 플리니우스의 편지는 그의 작업과 학문적인 규칙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소 플리니우스가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avunculus meus")에서, 그는 그의 삼촌의 아침 식사가 조상들의 관습에 따라(veterum more interdiula) 간단하고 가벼웠다고(levis et facilisla) 자세히 설명한다. 플리니우스 소는 플리니우스 장로가 위대한 로마 조상들의 관습을 유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훌륭한 로마인"이었음을 전달하고자 했다. 이러한 진술은 타키투스를 기쁘게 했을 것이다.
플리니우스 소의 고향을 코모로 밝히는 두 개의 비문이 베로나 이론보다 우선한다. 하나(CIL V 5262)는 플리니우스 소의 황제 관리로서의 경력을 기념하고 코모 시민을 위해 그가 기울인 상당한 자선 활동과 시정 활동을 자세히 설명한다. 또 다른 하나(CIL V 5667)는 그의 아버지 루키우스의 마을을 코모 근처 칸투의 작은 마을인 현재의 페키오(Fecchio)(오우펜티나 부족)로 확인한다. 따라서 플리니아는 아마도 현지 여성이었고, 그녀의 형제인 플리니우스 장로는 코모 출신이었을 것이다.[10]
가이우스는 플리니아 겐스(Plinia gens)의 일원이었다. 인수브레스 뿌리 "Plina"는 지역 성씨 "Prina"에서 음운 변화를 통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는 아버지의 코그노멘, 켈레르(Celer)를 따르지 않았지만, 자신만의 코그노멘 세쿤두스(Secundus)를 사용했다. 그의 양자가 같은 코그노멘을 사용했기 때문에, 플리니우스는 플리니우스 세쿤디(Plinii Secundi)라는 가지를 설립했다. 그 가문은 부유했고, 플리니우스 소가 상속받은 재산을 합치면 그가 학교와 도서관을 설립하고, 코모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먹여 살릴 기금을 기부하고, 로마와 코모 호 주변에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개인적인 호의로 친구들에게 부를 나눠줄 만큼 부유했다. 플리니우스 가문의 더 이전 기록은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전 59년, 플리니우스 출생 약 82년 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알프스 부족에 대항하여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노붐 코뭄(Comum으로 회귀)을 콜로니아la로 설립했다.[11] 그는 다른 주에서 4,500명의 인구를 코마스코에 배치하고 500명의 귀족 그리스인을 노붐 코뭄 자체에 정착시켰다. 따라서 그 공동체는 다민족적이었고 플리니우스 가문은 어디에서든 왔을 수 있다. 플리니우스의 그리스어 선호도에서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지, 또는 율리우스 포코르니가 북이탈리아어에서 "대머리"로 이름을 유래한 것인지[12]는 추측의 문제이다. 플리니우스 시대의 어떤 민족적 차이에 대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그 인구는 스스로를 로마 시민으로 여겼다.
플리니우스 장로는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 그는 유언장에서 조카를 양자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조카는 그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었다. 이 입양은 이 주제에 대한 저술가들에 의해 "유언 입양"이라고 불린다. 그들은 그것은 이름 변경에만 적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로마 법률은 그러한 범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플리니우스 소는 플리니우스 장로 사후에 그의 양자가 되었다.[13] 그러나 적어도 어느 정도 기간 동안 플리니우스 장로는 미세눔의 같은 집에서 여동생과 조카(각각 남편과 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사망함)와 함께 거주했다. 플리니우스 장로가 베수비오 화산 폭발을 조사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은 그곳에 살고 있었고 구조 작업과 친구로부터의 도움 요청 메시지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
2. 2. 초기 경력과 군 복무
이탈리아 북부의 노붐 코뭄(현재의 코모)에서 태어났다.[57] 플리니우스의 아버지는 그를 로마로 보내 법률 교육을 받게 했다.[52] 그는 사상적으로 스토아 학파의 논리와 자연철학, 윤리학을 따랐다. 스토아 학파는 자연법칙에 따라 덕 높은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이를 위해 자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조카 소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플리니우스는 새벽부터 일하며 공부 외의 시간은 낭비라 여겼고, 목욕할 때 외에는 항상 독서를 했다고 한다.[62][58] 그는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노니아누스를 만난 적이 있다고 언급했다.서기 46년, 약 23세의 나이에 플리니우스는 당시 기사 계급 젊은이들의 관례에 따라 하급 장교로 군에 입대했다. 로널드 시임(Ronald Syme)은 그가 세 단계의 군 계급을 거쳤다고 분석했다.[14][15] 플리니우스는 로마 문학에 대한 관심 덕분에 고위 문학가들의 주목과 우정을 얻었으며, 이는 훗날 그가 국가 고위직에 오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의 지식과 능력 자체도 신뢰를 얻는 요소였다.
시임에 따르면, 플리니우스는 처음에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에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휘하의 '''코호르트 지휘관'''(praefectus cohortisla)으로 복무했다. 이는 보병 부대를 지휘하는 역할이었다. 서기 47년에는 카우키족 정복과 마스 강과 라인 강 사이의 운하 건설에 참여했다.[52] 그가 밤새 강에 정박한 로마 함선들이 떠내려오는 나무들을 막아야 했던 상황을 묘사한 것은 직접 경험한 기록임을 보여준다.[16]

이후 플리니우스는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로 전속되어, 코르불로의 이복형제인 푸블리우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휘하에서 '''군사 트리뷰누스'''(military tribunela)[14]로 승진했다. 이는 지역 사령관이 임무를 부여하는 참모 직책이었다. 폼포니우스와 코르불로는 비스틸리아라는 로마 상류층 여성을 어머니로 두었다.[17] 플리니우스는 서기 50년(27세, 복무 4년차)에 카티족에 대한 원정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사령관의 '''프라에토리움'''(praetoriumla)에서 함께 지내며 문학적 소양이 깊었던 폼포니우스와 친밀한 친구가 되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플리니우스는 다시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로 전속되었다. 코르불로가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지휘권을 넘겨받은 것이다. 이번에는 '''기병 대대 지휘관'''(praefectus alaela)으로 승진하여 약 480명의 기병을 지휘했다.[18] 그는 남은 군 복무 기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장식용 '''팔레라'''(phalerala)가 현재의 크산텐인 '''카스트라 베테라'''(Castra Veterala)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당시 라인 강 하류의 대규모 로마 군대 및 해군 기지였다.[14] 그의 마지막 지휘관은 서기 55년부터 58년까지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을 지낸 폼페이우스 파울리누스였다.[19] 플리니우스는 파울리누스가 게르만족과의 전투를 위해 약 5443.10kg의 은식기를 가지고 다녔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엄격했던 플리니우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20]
소 플리니우스에 따르면,[18] 플리니우스는 이 시기(아마도 겨울 막사에서 여가 시간이 많을 때)에 기병의 투창 사용법에 관한 첫 저서인 『De Iaculatione Equestrila』("기병의 창 사용에 관하여")를 썼다.[52]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박물지』(Naturalis Historiala)에서 말의 움직임을 이용해 투창을 던지는 방법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일부 내용은 공개했던 것으로 보인다.[21] 또한 이 기간에 드루수스 네로의 영혼이 꿈에 나타나 자신의 업적을 기록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18] 이 꿈은 플리니우스가 로마와 게르만족 간의 모든 전쟁 역사를 집필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52] 그는 이 작업을 수년에 걸쳐 진행했다.
2. 3. 네로 시대의 저술 활동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네로가 즉위한 후, 플리니우스는 한동안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는 네로의 통치가 끝나는 서기 68년까지 국가에 봉사하는 고위직을 맡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네로 황제의 주목을 피하려 했음을 시사한다. 이 기간 동안 플리니우스는 주로 로마에 거주하며, 58년 코르불로의 참모진이 보낸 아르메니아 지도와 카스피해 인근 지역에 대한 정보를 접했으며,[22][52] 64년 로마 대화재 이후 네로가 건설한 도무스 아우레아(황금궁전)를 목격하기도 했다.[23]공직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플리니우스는 소송 변론 외에도 저술, 연구, 공부에 매진했다. 그는 자신의 옛 상관이었던 폼포니우스 세쿤두스에 관한 2권짜리 전기인 《폼포니우스 세쿤두스의 생애》를 저술했다.[18] 또한, 기념비적인 저서인 《게르마니아 전쟁》(Bella Germaniae)을 완성했는데, 이 책은 타키투스의 《연대기》에서 명시적으로 인용된 유일한 자료이며,[52] 같은 저자의 《게르마니아》의 주요 자료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 하지만 이 책은 현재 실전되었다.[24]
네로의 통치가 진행될수록 그의 행동은 예측 불가능해졌고, 플리니우스는 비교적 안전한 주제인 문법과 수사학 연구 및 저술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52] 그는 수사학 교육 교재인 《스투디오수스》(Studiosus, 학생) 3권 6책과[18] 《두비우스 세르모》(Dubius Sermo, 의심스러운 어법) 8권을 출판했다.[52] 그의 조카 소 플리니우스는 이 시기에 대해 "네로 치하 말년에는 조금이라도 독립적이거나 고상한 모든 종류의 문학적 활동이 노예 상태로 인해 위험해졌다"고 전했는데, 이를 통해 당시의 엄혹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 수사학 관련 저서들 역시 현재는 실전되었다.
68년, 네로가 지지 기반을 잃고 자살하면서 그의 공포 정치는 막을 내렸고, 플리니우스가 공직에서 물러나 있던 시기도 끝났다. 네로 시대의 엄혹한 환경 속에서 플리니우스는 주목받을 만한 역사서나 정치적인 글쓰기를 피하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전기, 어학, 수사학 분야의 저술 활동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2. 4.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의 공직 생활
서기 69년 말, 네로 황제가 사망한 후 약 1년간 이어진 내전이 끝나고 성공적인 장군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했다. 플리니우스처럼 기사 계급 출신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대와 공직을 거치며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주요 과제는 로마 제국의 통제를 회복하여 평화를 재건하고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행정부 내에서 가능한 모든 충성심과 지원을 필요로 했다.[25]
플리니우스는 의심할 여지 없이 베스파시아누스의 신뢰를 받았으며, 아마도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티투스의 추천을 받아 즉시 황제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플리니우스는 이 시기에 가장 저명한 관리직들을 연이어 맡았다.[25] 당시 관리(procurator)는 일반적으로 제국 속주의 재무관 또는 총독을 의미하는 직책이었다. 로마 제국은 항상 수많은 공직을 채울 인력이 부족했기에 유능한 인재를 찾고 있었다.
플리니우스는 말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조카 소 플리니우스는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삼촌의 일과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Ante lucem ibat ad Vespasianum imperatorem (nam ille quoque noctibus utebatur), deinde ad officium sibi delegatumla.
> 새벽 전에 그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 갔다 (그 또한 밤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런 다음 그에게 할당된 다른 업무를 했다.
이 글에서 소 플리니우스는 삼촌이 항상 학자로서 끊임없이 일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라틴어 원문의 'ibat'(갔었다)는 단어는 이것이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행동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또한 삼촌이 하루 대부분을 일하고, 읽고, 쓰는 데 보냈으며, "잠이 매우 잘 오는 편이어서 때로는 공부하다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곤 했다"고 덧붙였다.[26]
플리니우스가 역임한 관리직에 대한 결정적인 연구는 고전학자 프리드리히 뮌처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후 로널드 시임에 의해 재확인되어 표준적인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뮌처는 플리니우스가 네 개의 관리직을 역임했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이 중 두 개는 확실히 증명되지만 나머지 두 개는 가능성은 있으나 불확실하다. 그러나 두 개의 관리직만으로는 수에토니우스가 언급한 '연속적인' 임명을 설명하기 어렵다.[27] 따라서 학자들은 플리니우스가 2개에서 4개의 관리직을 맡았을 것으로 보며, 4개를 가정할 경우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70년)
2. 아프리카 속주 (70년 ~ 72년)
3.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72년 ~ 74년)
4. 갈리아 벨기카 (74년 ~ 76년)
시임에 따르면, 플리니우스는 서기 70년 초 갈리아 나르보넨시스(현재의 프랑스 남동부)의 관리였던 발레리우스 파울리누스의 후임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플리니우스는 이 속주와 "친숙함"을 보였는데,[28] 예를 들어 그는 이 지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29]
> 토지 경작, 주민들의 풍습과 문명, 부의 규모에 있어서 이 속주는 어떤 속주에도 뒤지지 않으며, 간단히 말해 속주라기보다는 이탈리아의 일부라고 더 정확하게 묘사될 수 있다.
이는 그가 해당 지역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플리니우스는 아프리카 속주에서도 시간을 보냈을 것이 거의 확실하며, 아마도 관리로서였을 것이다.[30] 그는 이곳에서 프실리족이 독두꺼비(''루베타에'')를 다루는 모습,[31] 흙벽돌로 지어진 건물("어떤 시멘트보다 강도가 뛰어난"),[32] 그리고 현재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튀니지 가베스(당시 타카페)의 비옥한 해안 오아시스 등을 목격했다고 기록했다.[33] 시임은 플리니우스의 아프리카 관리직 재임 기간을 서기 70년에서 72년 사이로 추정한다.
다음으로 플리니우스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현재의 스페인 북동부)의 관리를 맡았다. 이는 소 플리니우스가 삼촌이 히스파니아의 관리로 있을 때 라르키우스 리키니우스가 그의 원고에 대해 4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제안했다고 언급한 기록이 있어[18] 세 관리직 중 가장 확실하게 여겨진다. 플리니우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히스파니아 근처"(현재의 아스투리아스와 갈리시아 지역) 사람들의 인구 통계와 시민권 정보를 상세히 나열하다가 "독자를 지치게 할까 봐" 중단하기도 했다.[34] 이처럼 특정 지역의 상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이례적이기에, 시임은 플리니우스가 서기 73년에서 74년 사이에 황제의 특사 비비우스 크리스푸스가 실시한 인구 조사에 기여했으며, 이를 통해 그의 관리직 재임 시기를 추정했다.[35]

히스파니아에 머무는 동안 플리니우스는 스페인 북서부 지역의 농업, 특히 금 채굴 방식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다.[36] 그의 저서 《자연사》에 나타난 다양한 금 채굴 방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그가 직접 목격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라스 메둘라스의 광산을 직접 방문했을 가능성이 크다.

플리니우스의 마지막 관리직은 불확실하지만, 그가 해당 지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갈리아 벨기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속주의 수도는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현재의 트리어)이었다. 플리니우스는 "바로 전 해"의 혹독한 겨울 때문에 트레베리족이 심은 첫 곡식이 죽었으나, 그들이 3월에 다시 파종하여 "매우 풍부한 수확"을 거두었다고 기록했다.[37] 이 기록이 쓰인 시점을 77년으로 가정하고, 플리니우스가 이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고 본 시임은[38] 그의 갈리아 벨기카 관리직 재임 기간을 서기 74년에서 75년 사이로 추정했다. 이 주장은 전적으로 추정에 근거하지만, 만약 그가 갈리아 벨기카의 관리를 맡았다면, 수에토니우스가 언급한 '연속적인' 관리직 경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가 필요하다.
플리니우스는 서기 75년 또는 76년경 로마로 돌아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마도 77년 《자연사》의 첫 공식 발표를 위해 로마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가 75년 포룸에 세워진 베스파시아누스의 평화의 신전 봉헌식에 참석했는지, 또는 로마의 야경대(비길레스)를 지휘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이 시기 그의 정확한 직책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단순히 황제의 공식 대리인으로서 준사적인 지위에 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이후 미세눔의 제국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39] 그곳에 거주하며 여동생 및 조카와 함께 살았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79년 6월 23일 병으로 사망했으며, 플리니우스는 그보다 약 2개월 뒤인 8월 말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사망했다.
2. 5. 베수비오 화산 폭발과 죽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 해군 함대 사령관(praefectus classisla)으로 임명되었던 플리니우스는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나폴리 인근 미세눔(Misenum)의 함대에 주둔하고 있었다.[39] 그는 화산 현상을 자세히 관찰하려는 과학적 열의와 함께, 폭발로 인해 스타비아이(Stabiae)에 고립된 친구 렉티나(Rectina)로부터 구조 요청 연락을 받고 구조 작전을 조직하여 이끌었다.[51] 플리니우스는 나폴리 만을 건너 스타비아이로 향하는 여러 척의 갤리선 중 한 척에 직접 올랐다.[51]플리니우스의 배가 헤르쿨라네움 근처 해안에 접근하자, 뜨거운 화산재와 부석이 비처럼 쏟아졌다. 선장은 위험을 감지하고 돌아가자고 조언했지만, 플리니우스는 "용감한 자에게는 행운이 따른다"(Fortes fortuna iuvatla)라고 답하며, 원로원 의원 폼포니아누스(Pomponianus)가 있는 스타비아이로 계속 나아가라고 지시했다.[51] 스타비아이에 도착하여 폼포니아누스를 만났으나, 그들을 데려온 바람 때문에 떠날 수 없었다. 그들은 바람이 바뀌기를 기다렸지만, 화산 지진이 격렬해지면서 건물 붕괴를 우려하여 해안으로 피신했다.[51]

해안에는 갑자기 뜨겁고 유독한 가스와 유황 냄새가 짙게 몰려왔고, 사람들은 흩어져 달아났다. 평소 천식과 같은 만성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었고[51][59] 비만했던[51] 플리니우스는 유독 가스로 인해 질식사하여 그 자리에 쓰러졌다.[63][51] 분화가 시작된 지 사흘 뒤, 유독 가스가 걷히자 일행이 돌아와 플리니우스의 시신을 발견했다. 조카 소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외상 없이 마치 잠든 모습과 같았다.[51]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27년 후 역사가 타키투스의 요청으로 조카 소 플리니우스가 당시 스타비아이 생존자들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편지에 기록하여 전한 것이다.[51][18][52]
플리니우스의 정확한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존재한다. 소 플리니우스는 삼촌이 평소 앓던 천식 때문에 유독한 연기(가스 또는 화산재)에 기도가 막혀 질식사했다고 기술했다.[51][59] 현대의 분석으로는 화산쇄설류에 포함된 미세한 화산재 흡입에 의한 질식(세인트헬렌스산 폭발 당시에도 유사한 사망 사례가 있었다)[59], 플리니우스가 쓰러질 때 묘사된 유황 냄새를 근거로 황화수소 같은 화산 가스에 의한 급성 중독[59], 또는 고온 가스 흡입에 따른 심각한 기관지 화상[59] 등이 가능한 사인으로 거론된다. 한편, 수에토니우스는 플리니우스가 순전히 과학적 호기심으로 해안에 접근했다가 화산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노예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했다고 기록했다.[53] 1859년 의사 제이콥 비글로우는 소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의학적으로 분석하여 뇌졸중이나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54]
3. 저서
플리니우스는 총 102개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물을 남겼으나, 현재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77년에 완성된 《박물지》( ''Naturalis Historia'' ) 뿐이다. 이 책은 자연과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지식의 보고로 평가받으며, 총 3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일부 오류를 포함하고 있지만, 고대 지식을 담은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박물지》 외에도 군기, 역사, 철학, 문법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저술 활동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이 저작들은 모두 소실되어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3. 1. 《박물지》 (Naturalis Historia)
플리니우스의 수많은 저작물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77년에 완성된 《박물지》( ''Naturalis Historia'' ) 뿐이다.[18] 이는 자연과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사전으로,[45] 일부에서는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여기기도 한다.[45] 총 37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지만, 일부 오류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박물지》의 집필은 플리니우스가 네로 황제 치하에서 다른 저술 활동을 마치고,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 등을 역임하며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70년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독특한 방식을 사용했는데, 노예에게 책을 소리 내어 읽게 하고 다른 노예가 중요 내용을 받아 적게 하는 방식이었다.[18] 심지어 목욕 중에도 이러한 작업을 계속했으며, 겨울에는 필사하는 노예에게 장갑을 주어 손이 얼지 않도록 배려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모인 발췌 자료는 약 160권에 달했으며,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의 프라이토리안 레가투스였던 라르키우스 리키니우스가 40만 세스테르티우스라는 거액에 구매하려 했으나 플리니우스는 이를 거절하고 조카 소 플리니우스에게 유산으로 남겼다.[18]

《박물지》는 77년경 완성되어 당시 황제였던 티투스에게 헌정되었다.[47] 책의 서문에서 플리니우스는 티투스를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함께 언급하며 그의 공직 경력을 명시하는데, 티투스가 여섯 번째 집정관을 지낸 해가 77년이라는 점을 근거로 헌정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46][47] 비록 플리니우스가 79년 베수비오 산 분화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최종 수정 작업을 마치지는 못했지만, 《박물지》는 로마 제국 시대의 가장 방대한 단일 저술로 남게 되었다.[49]
이 책은 식물학, 동물학, 천문학, 지리학, 광물학 등 자연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민족학, 인류학, 인체 생리학, 의학, 약학, 원예, 야금술, 미술사 등 인문·사회 및 기술 분야까지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다. 특히 광산에서의 수력 채굴 기술이나 곡물 제분에 사용된 수차와 같은 당시 기술 발전에 대한 기록은 《박물지》가 유일한 자료인 경우도 있으며,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그 내용이 확인되기도 한다. 또한, 당대 예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며, 로렌초 기베르티나 조르조 바사리 같은 후대 예술사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박물지》는 방대한 주제, 원전 인용 방식, 상세한 색인 등 여러 면에서 후대 백과사전의 모델이 되었다.[50] 비록 일부 내용에 미신이나 부정확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고대 로마의 지식과 사회상, 전통, 환상, 편견 등을 이해하는 데 있어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며,[50] 르네상스 시대까지 서양 학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대 학자들 역시 다른 고대 문헌에서 발견된 불분명한 대상을 《박물지》의 묘사와 비교하여 분석하기도 한다.[50]
3. 2. 기타 저서 (실전)
플리니우스는 역사와 과학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총 102편에 달하는 저작물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방대한 저작물 중 현재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77년에 완성된 《박물지》(Naturalis Historia|나투랄리스 히스토리아la) 단 하나뿐이다.[61]《박물지》 외에 플리니우스가 저술했지만 현재는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 주요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 기병의 투창 사용에 관한 논저: De iaculatione equestri|데 야쿨라티오네 에퀘스트리la
- 폼포니우스 세쿤두스의 생애: De vita Pomponi Secundi|데 위타 폼포니 세쿤디la
- 웅변술 양성서 (3권): 조카인 소 플리니우스를 위해 쓴 것으로 추정된다.
- 어형 변화와 활용에 대해 논한 저서 (8권)
- 게르마니아 전쟁사 (20권)
- 로마 제국의 역사 (서기 41년 ~ 71년, 31권)
이 외에도 군기, 철학, 문법에 관한 저작이 있었으나 모두 소실되었다.
4. 현대의 창작물
- 『화산에 죽다』: 시부사와 료히코의 단편 소설로, 플리니우스를 주인공으로 다룬다. 『문예』|분게이일본어(河出書房新社) 1979년 4월호에 발표되었으며, 河出文庫|가와데 문고일본어의 『당초 이야기』(ISBN 978-4-309-40473-8)에 수록되어 있다.
- 『플리니우스』: 야마자키 마리와 토리 미키가 그린 만화로, 플리니우스를 주인공으로 한다. 『신초 45』|신초 욘주고일본어(신초사) 2014년 1월호부터 연재를 시작했으며, 해당 잡지 휴간 후 『신초』|신초일본어(신초사)로 옮겨 2019년 1월호부터 연재를 이어가 2023년 3월호에 완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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